바람 끝에 선 순례자, 안주 이리
안주 이리는 백악기의 마지막 장을 건너던 가느다란 긴장으로 다가옵니다. 이 이름은 사라짐 직전의 대지에서 끝내 길을 찾으려 했던 생명의 호흡처럼,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울립니다.
시간의 문턱을 넘어
마스트리흐트절의 끝자락, 70.6 ~ 66 Ma의 하늘 아래 Harding과 Slope의 땅은 습한 바람과 먼지 냄새를 천천히 섞어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저녁빛이 길어지는 평원 위로 안주 이리의 하루가 펼쳐지고, 거대한 종말의 예감 속에서도 오늘을 버티는 발걸음이 이어지는 모습입니다.
진화가 남긴 고유한 문법
안주 계통의 체형 설계는 정면의 힘겨루기보다 움직임의 타이밍을 살리는 방향으로 읽히며, 몸의 구성 하나하나가 살아남기 위한 신중한 선택으로 전개됩니다. 어쩌면 이 형태의 문법은 같은 시기의 거인들과 사냥꾼 사이를 지나야 했던 세월이 빚어낸 답안이었고, 그래서 화려한 과시보다 유연한 생존에 더 가까웠을 것입니다. 트리케라톱스 프로르수스와 안주 이리가 나눈 공존의 거리 같은 시기와 같은 권역에서 트리케라톱스 프로르수스와 다코타랍토르 스테니가 존재하던 장면은 충돌의 서사보다 거리의 감각으로 먼저 그려집니다. 누구는 방어의 리듬을, 누구는 추적의 리듬을 택했기에 안주 이리는 그 사이의 동선을 세심하게 비켜 가며 층위를 나눠 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그 평원은 승패의 한 줄이 아니라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며 지나가는 복수의 생존법으로 빛납니다.
잠들지 않은 여백
우리에게 닿은 흔적이 단 두 차례라는 사실은 부족함이 아니라, 지구 역사가 오래 감춰 둔 희귀한 증언에 가깝습니다. 2014년 Lamanna 외 연구진이 이름을 세상에 꺼내 든 뒤에도 Harding과 Slope의 깊은 지층에는 아직 열리지 않은 장면이 남아 있습니다. 비로소 다음 발굴이 문을 열면 이 조용한 주인공의 하루가 더 선명해지겠지만, 여전히 남은 침묵이 이 이야기를 더욱 오래 숨 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