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안개를 두른 초원의 수호자, 아노프로사루스 쿠르토노투스
아노프로사루스 쿠르토노투스라는 이름은 잔잔하지만 오래 남는 파문처럼 귀에 맴돕니다. 영국 캠브리지셔의 눅은 지층에서 건너온 이 존재는, 요란한 위용보다 오래 버티는 침묵으로 자신을 말하는 모습입니다. 아노프로사루스 계통의 결은 처음부터 견딤의 리듬으로 짜여, 시간 앞에서 낮고 단단한 호흡을 고릅니다.
고대의 풍경이 열리다 세노마니아절의 빛이 기울어 투로니아절로 넘어가던 동안, 캠브리지셔의 땅은 물기 어린 평원을 접고 펴며 계절을 오래 품었습니다. 그 층 사이로 99.6 ~ 93.5 Ma의 공기가 천천히 흐르고, 발밑의 흙 한 겹마다 늦은 파도 같은 시간이 번져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명의 윤곽을 읽기보다, 먼저 그 생명을 떠받친 세계의 숨을 듣게 됩니다.
진화가 남긴 고유한 문법
아노프로사루스의 몸은 화려한 과시 대신 중심을 낮추고 균형을 지키는 쪽으로 다듬어진 듯 그려집니다. 골격의 비율과 하중을 나누는 방식은 하루를 무사히 넘기려는 고단한 선택이었고, 느린 걸음 하나에도 생존의 고심이 스며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계통의 형태는 무기를 흔드는 선언이 아니라, 끝내 살아남기 위해 써 내려간 조용한 문장으로 전개됩니다. 아칸토폴리스 마크로케르쿠스와 아노프로사루스 쿠르토노투스가 나눈 공존의 거리 같은 세노마니아절, 같은 캠브리지셔에서 아칸토폴리스 마크로케르쿠스가 모습을 드러낼 때 평원은 하나의 무대이되 동선은 둘로 갈라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노프로사루스 계통과 아칸토폴리스 계통은 몸을 설계한 철학이 달라, 정면의 충돌보다 서로의 자리를 읽고 비켜 가는 균형을 택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같은 땅의 더 이른 층에서 사르코레스테스 렏시의 자취가 낮게 남아, 이 지역의 생명들이 긴 시간에 걸쳐 역할을 나누어 왔음을 들려줍니다.
지층이 숨긴 질문들 남겨진 화석은 단 1건, 부족함이 아니라 지구가 좀처럼 열어 주지 않는 희귀한 문 한 장입니다. 1879년 Seeley가 건넨 이름 이후에도 이야기는 닫히지 않았고, 오히려 가장 중요한 대목을 조용히 접어 둔 채 우리를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어쩌면 다음 발굴은 캠브리지셔의 깊은 층에서 이 침묵의 문장을 이어 붙여, 아노프로사루스 쿠르토노투스의 하루를 더 또렷하게 밝혀 줄 것입니다.